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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봉기 삼별초는 고려가 몽고와 싸울 때, 선두에 섰던 가장 핵심적인 반몽집단이다. ‘몽고병이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정으로 모여라!’삼별초는 고려왕조가 몽고에 굴복하자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는 것은 한 나라의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삼별초는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구성했던 것일까.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던 강화로 간다. 2. 진도를 택한 이유 삼별초는 개경 정부의 공격을 피하고 새로운 거점을 물색하기 위해 서둘러 강화를 떠난다. 당시 삼별초가 이끌었던 배는 무려 천 여 척. 거기에는 결연한 항몽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포 앞바다의 진도에 닻을 내리게 된다. 삼별초가 진도를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3. 삼별초의 정통성 삼별초는 진도에 새로운 도성을 마련하고 궁궐 용장성을 구축했다. 용장성은 웅장했고 한 나라의 성으로서 손색이 없는 면모를 갖췄다. 삼별초는 진도를 장기적으로 경영 하려했고, 몽고와 끝까지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로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렇다면 삼별초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지 않고 굳이 고려의 정부를 내세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4. 삼별초의 세력권 삼별초는 내륙으로의 세력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삼별초는 워낙 정예 군대였고, 오랫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전투경험도 풍부해진 군대였다. 삼별초의 해상 능력은 막강했는데, 징과 북을 동원하고 함선에 괴상한 동물을 그려 바다에 비추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적을 먼저 심리적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도를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구가했다. 5. 민중정부 삼별초 삼별초에 대한 민심은 각별했다. 특히 삼별초가 봉기 직후에 도적을 불태우면서 민심을 끌어당기게 된다. 도적이란 정부 문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노비 문서도 포함된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삼별초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 그리고 민중의 정부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신분제도가 엄격한 사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의식이 가능했던 것은 삼별초 지휘관들의 출신배경 때문이었다. 6. 진도에서의 최후 1271년 5월15일. 진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여몽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병선 4백 여 척에 군사는 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한달 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감행한 총공격으로 삼별초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용장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지금도 진도에는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있다. 7. 삼별초의 제주항쟁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오자마자 우선 방비를 튼튼히 했다. 그리고 겹겹의 저지선을 마련하고 다시 해상활동을 전개, 본토의 연안 지역을 공략해 나갔다. 그러자 개경 정부와 몽고는 마침내 제주를 공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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